テキスト ボックス: 일본방송대학원 석사논문

 

나가노현시나노에 고대 중국 조선의 도래 문화

                              2009 8 9 

 

처음에  <연구 의 목적>

고대 일본에는 중국 한반도로부터 기술과 문화가 도래했다. 한자나 철, 구리, 불교, 약품, 삼이나 비단, 그리고 더욱 오래 전에는 벼농사 등등 현대 일본 사람의 생활 기반이나 정치, 사회 제도까지 널리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에도 시대의 쇄국 정책을 거쳐 메이지유신 후에는 선진국인 유럽에서 근대 과학기술과 문화, 정치제도를 도입했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에 걸쳐 일본은 유럽으로부터 많은 문물을 배웠으며 그 과정을 통해서 유럽을 능가하고자 하였다. 한편, 일본이 고대 문물을 전수받은 중국, 조선은 일본보다 근대화에 한발 늦었다. 또한 일제시대 일본은 대륙으로의 진출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을 일본보다 떨어지는 하위국이라고 보고, 일본의 지배하에 두려는 정책을 펼쳤다. 그 후, 고대 중국이나 한반도를 통해 전래된 기술과 문화 등을 일본 고유의 전통으로서 교육하려는 경향이 보이기도 한다. 또한, 기나긴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한반도에서 건너 온 도래인들도 일본에 동화됨으로써, 자신들의 뿌리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게 된 듯 하다.

 저는 누가 무엇을 했는지를 명확히 함으로써, 역사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고향인 나가노현 북동부에 많이 남아 있는 고분을 연구 대상으로 정했습니다. 그 고분의 대부분이 매장된 사람이나 만든 사람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어서, 문헌을 조사하거나, 국내의 다른 지역 또는 중국, 한반도의 고분과 비교함으로써, 기원을 고찰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나가노현: 고명은 시나노(信濃)” . 일본의 중앙부에 있고, 주위는 3000 m급의

높은 산맥 (3개 국립 공원)으로 둘러싸인다.

나가노시: 백제에서 전래 한 불상을 받드는 젠코우지(善光寺)나 사과의 산지에서 유명. 1998년에 동계 올림픽을 개최 해서, 저도 자원봉사자 통역으로써 참가 했다.

 

1장 고분의 실태 

1절 용어 해설

2절 고분의 종류

2장 조사 보고서·실지 견학

1절 국내 나가노현 및 그 주변

2절 한국 (백제, 가야)

3절 중국 (고구려 )

3장 상관관계의 연구

1절 연구사의 설

2절 고분의 형태, 출토품에 의한 상관

3절 풍토에 의한 상관

4절 그 밖의 상관

정리

  결론

  금후의 과제

 

 제 1장 고분의 실태 

1절 용어 해설

(1)적석총란    

고분 시대의 무덤 제의 일종. 성토로 분 언덕을 쌓는 고분에 대하여, 돌을 쌓아 올려서 분 언덕을 구축 하는 고분을 적석총라고 부른다. 또한 쾰른이라고도 하고, 세계 각지에 분포된다.

분 언덕 형태는 원분이 많지만, 방분, 전방후원분도 볼 수 있다. 서일본의 적석총에게는 4세기에서 5세기에 속하는 전·중기 고분과, 6,7세기후기에 조영되었지만 2시기가 있고, 동일본에서는 중·후기부터 종말기에 걸쳐서 축조되어 있다. 적석총의 생성은, 조선 반도의 무덤 제가 도래 되었다고 하는 설이라고, 석재를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입지 환경에서 생긴다고 하는 설이 있고, 나가노현 오오무로 고분군, 야마나시현 요코네 고분군, 아이치현 기두산 고분군, 가가와현 이와세오야머고분군, 야마구치현 미시마 지컴보고분군이 유명하다. (오오츠카 하츠시게 교수 )

전국에 약 15만기 있다는 말을 듣는 고분 중 1 % 1,500기가 적석총이다. 그 속의 55 %가 나가노현내에, 더욱 그 속의 48 % 나가노북쪽의 타카이군나이에 굳어지고 있다. (키리하라 터케시 선생님)

    

나가노시 오오무로 고분군    합장형      고후시 요코네 고분군

 

(2)문헌

『삼국사기』

고려 17대의 왕, 인종의 명령에 의해서 김부식들이 11431145년에 완성하게 한 삼국시대(신라·고구려·백제)부터 통일신라 말기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기전체의 정사이다. 조선 반도에 현존 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유사』

13세기 말에 연 듯이 말하는 승려에 의한 사찬의 조선 고대의 역사서이다. 서명의 「유사」은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항을 수록 한 의미가 있고, 일화나 전설의 동류가 널리 바쳐지고 있다.

 

『삼국지』

서진시대의 진수에 의해서 280290년 쯤에 편찬된 기전체의 역사서. 후한의 혼란기에서, 서진에 의한 삼국통일까지의 삼국시대에 대하여 씌여진 중요한 사료.

(3)토기

하지기

야요이식 토기의 계통을 이어받고, 고분 시대나라·헤이안 시대까지 생산된 초벌구이의 토기이다. 600750 ℃로 굽이루어지고, 귤색 혹은 적갈색을 나타내고, 스에기에 비교하고 연질이다. 토용도 하지기이다.

 

스에기

고분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까지 생산되고 푸른회색으로 단단하게, 같은 시기의 하지기 보다 고급한 물건으로써 취급되었다. 11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점토중의 빨간 산화 제 2철이 환원되어서 산화 제 1철에 변질되기 때문에 독특한 색깔이 된다. 중국 강남 지역에 시작하고, 5세기에 조선 반도 남부의 가야에서 전해졌다. 일본에서 제작된 소물만을 스에기라고 말한다. 조선 반도의것은, 도질 토기라고 불리우든지, 가야 토기·신라 토기·백제 토기등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등에서의 도래인이 제작 했다는 기술이 있는 한편, 수인 천황의 시대에 신라 왕자라고 그 종자로서 스에기의 기능공이 왔다와도 기록되고 있지만, 이것과 관계가 깊다고 여겨지는 시가켄 류오쵸의 가가미따니 솥 흔적군이나 왕자가 살았다는 말을 듣는 다지마 지방에서도 초기의 스에기는 확인되어 있지 않다.

이 기술은 백제에서 가야를 지나서 일본열도에 전해졌다고 생각되고 있다.

 

2절 고분의 종류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고분」이라고 듣는다고 사카이시의 인덕 천황능 같은 전방후 원 분을 회상하고, 그 주변에 많이 존재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는 좀 더 다종이며, 또 일본 각지에 널리 분포된다.

 

(1)

일본의 고분은 많은 차례로 효고현 16,577, 지바현 13,112, 돗또리현 13,094, 후쿠오카현 11,311, 쿄또후 11,310, 전국 합계에서는 161,560기로 되는 (2001 3월 말 문화청 )

 

 (2)모양

일본의 고분에는, 기본적인 모양 원분·방분과 그 조구성의 전방후원분·전방후방 분이 일반적이다. 또한 쌍원분·쌍방분·8각 분(천무·지통 천황능)등도 있다. 주요한 고분 (특히 천황능), 산이 두가지 있는 타이프의 고분인 것이 많다.

 

 (3)매장 형태

매장 형태에는, 구동식계와  굴식계가 있다.

구동식계는, 분 언덕의 위에서 계속 구멍을 파고, 그 바닥에 관을 설치해서 물어 되돌린것이다. 기본적으로 추가장는 못 하고, 사람이 활동 할것 같은 공간도 없다. 구동식 석곽  , 점토곽  , 함식 석관, 목관직장등이 있다.

굴식계는, 분구 측면에 선로의 입이 있고, 굴식석실, 굴식석곽  등이 있다. 굴식 석실은, 통로인 선 미치부와 매장용 공간인 현실부를 가진다. 놀길은 폐색석이나 문석으로 막힐 수 있지만, 그것을 열면 추가장가 가능해서, 고분 시대 후기 이후에 성행했다.굴식석곽은, 석실내에 놓여지고 있었던 석관이 단체로 매장 시설로 된것으로, 고분 시대 종말기에 많이 볼 수 있다.

 

 (4)재료

분묘

돌만의것, 돌과 흙, 성토만의것이 있다. 된 당초는 나무는 없었지만, 긴 시간을 지나서 수목으로 뒤덮히고 있는것이 많다.

돌에도 둥근 자연석과 나눠서 평평하게 한 돌이나, 면을 완성한 돌이 있다.

 

관의 재료에 따라서, 옹 관, 목 관, 석관, 건칠 관등이 있다.

목 관에도 거목을 종으로 둘로 나눠서 내부를 파임 뺀것과 뚜껑·바닥·좌우 전후의 측판등수매의 장방형의 판자를 맞춘의가 있다. 

 

2장 조사 보고서·실지 견학

1절 나가노켄 및 그 주변

저는 나가노켄내를 처음, 주변의 시즈오카, 야마나시, 군마, 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켄의 지역의 고분, 박물관등 관련 유물을 견학 했다.

각각의 토지에 다양한 종류, 시대의 고분이 혼재 하고, 한묶기로 나타내는 것을 어렵다. 또한 저는 도래 문화, 적석총라고 말하는 관점에서 보고 다녔기에 견해가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나가노켄은 모리 장군 둔덕과 같이 크게 훌륭한것에서 오오무로 고분군과 같이 소형으로 간단한것까지 다종다양하게 있다. 일본해측에서 직접 반도의 영향을 받거나, 남쪽에서 야마토 조정의 영향을 받거나 쓰고고 생각한다.

나가노시 모리장군총고분

또한 나가노, 야마나시, 군마, 도야마, 이시카와켄의 고분은 주위에 홈을 파어져 있는 천황능 같은 고분이 거의 없다. 그리고 평지 보다 산의 사면이나 봉우리의 꼭대기에서도, 매장자의 관리지인 수전이나 만, 먼 높은 산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고대에 만들어진것이 많다. 그 점 시즈오카켄 하마마츠·시마다시 부근에서는 평지에 천황능 같은 분위기를 가지는 고분이 많아, 저는 야마토 조정의 영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2절 한국 서울, 공주 (8월 말), 가야

(1)서울 (백제 )

2008 6월 저는 서울 강남에 있는 백제 시대의 석촌동고분 (적석총 ), 방이동 고분 (원분)을 보고 왔다. 석촌동 3호 분는 약 50 m 3단의 기단이 있고, 크기 뿐만 아니라, 대단히 훌륭한 적석총이다.

서울 석촌동 고분

다음에 2009 6월 저는 한국 남부의 고분에 다녀 왔다. (별지도 4, 4)

이하 주된것에 대하여 말한다.

 

(2)적석총

적석총는 울산에서 고장 동사무소의 사람에게 안내 해 받고, 은현리고분 1기가 있었던것 만으로, 상당히 적다. 고구려도 이 부근까지 남쪽 정벌했지만, 적석총를 많이 남기는 것은 없었던것 같다. 적석총는 한국 남부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일본에 넘어간것이라고 생각한다.

은현리적석총  (울주군 검단리)

설명판 

(3) 하대리 고분 ( 울주군 샘리 )

후술 제 3장 제 1절로 모리 교수에 의하면,

「기지마다이라무라의 네츠카 고분에서 고사리수상에 구부러졌던 철 검이 출토 했다. 구부러졌던 철검은 울산 하대유적에서도 출토 하고 있다. 」것이라고 해서, 저는 고장 동사무소의 사람에게 하대고분도 견학시켜 받았다. (당국의 HP에 의하면 출토품은 현재 외부에 있고, 2010년에 울산 박물관이 완성하면 모아서 전시될 예정. )

 

(4)가야의 고분

가야 (한국 남부 중앙부)의 고분은 일반적 한국의 고분 이미지인 흙 만두형의 원 분이 태반이지만, 잔디가 곱게 깎아지고 있어서, 일본 같은 나무는 없다.

  

고령 치산동 고분군           합천 억촌동 고분군

출토품도 금관, 금세공, 옥세공의 정교함, 아름다움과 함께, 철제품의 다양함과 훌륭함이 있다. , 투구와 갑옷, 농공 기구, 그것에 말을 지키는 갑옷, 장식까지 있고, 이들과 닮은 철제품은 일본의 고분에서도 잘 출토 한다. 그것은 중국의 삼국지에 변 진반로국 (고령의 대가야)에 관해서 이하의 기술이 있고, 왜(倭도 그 철을 요구하고 있다.

魏书三十  乌丸鲜卑东夷传第三十

土地肥美,宜种五谷及稻,晓蚕桑,作缣布,乘驾牛马。嫁娶礼俗,男女有别。(略)国出铁,韩、濊、倭皆从取之。诸巿买皆用铁,如中国用钱,又以供给二郡。

(참고 1 )

일반적으로 일본인 유적이 발견된다고, 금제품이나 구슬이 출토 한 경우는 크게 보도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 특히 철기인 경우는 크게 보도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금은 보석은 비싼것이며, 그것을 가진 것은 권력·재력·외교의 증거에 , 고고학적으로는 오히려 철기가 중요라고 생각한다. 철은 녹슬어 버리고,

볼품이 나쁘고, 원형을 고정하지 않지만, 저는 철기에야 말로, 당시의 군사, 농경, 공예등 사회의 상태나 기술·문화의 도래를 나타내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2 )

한국에서는 크기는 2 m 미만이지만, 현대에서도 묘는 「흙 만두」로, 전통이 계속된다. 일본은 묘석 (묘비)모양이 되고 있지만, 이것은 토지의 적음에 의한 지혜인지. 그러나 일본의 묘석은 대부분이 사각으로 단쌓기의 기 단을 가지고,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정환기 수상록」육영 출판사 (2000)의 중에서, 정씨는 한국에서도 토장부터 화장에 하지 않으면 야단이다, 라고 이하와 같이 경고 하고 있다.

10년이나 지나면, 국토의 대부분은 흙 만두로 뒤덮힐 것이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 하기 때문에 토장을 금지 하고, 화장으로 해서 골회를 바다나 산에 살포 한다.  정부도 대책을 개서 법제화에 노력하고 있지만, 유림 관계자나 가족 제도의 이념 생끗 굳어진 사람들의 반대 운동으로, 생각컨대 맡기지 않는다. 여기는 정부가 대담한 대책을 세우고, 국가 천년의 원대한 계획 때문에, 국민에게 이해를 요구해야 한다.

 

(가야의 역사)

여기서 저는 일본과 관계의 깊은 부분을 조금 소개 한다.

 

가야의 발전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거듭되는 왜(倭)의 침입부터 도움을 바라는 신라를 도와서 400 년 출병을 정했다. 고구려군은 경주,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 했다. 당시의 대가야 는, 농업 생산력과 철광 개발을 통해서 안정 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 김해의 김관가야 이 광개토왕의 남쪽정벌으로 일부 세력은 일본에, 또 일부는 고령에 유입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역과 철광 개발에 대하는 노우하우가 전수되고, 고령의 대가야 는 비약적으로 성장 한것이라고 생각된다.

대가야의 전성기

고구려군의 출병 목적은, 왜(倭)의 신라 침공의 명분으로 가야 지역에 대하는 지배권을 장악 하고, 백제를 배후로 압박·베돌아서 왜(倭)의 진출을 봉쇄 하고, 한반도의 패권을 확고하게 하려고 하는 의도가 포함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남쪽 정벌은 가야에 큰 타격을 주고, 임나가라, 즉 김해의 김관가야 은 몰락 해서 이름만 남고, 야로의 철과 살찐 흙을 배경에, 대가야가 가야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일본서기』529 년에 대가야국의 왕과 신라의 왕녀와의 결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가야의 장신구

대가야 의 피어스 이어링은, 귀에 꽂는 고리에, 중천 볼의장식한를 연결쇠로 잇는 장식이 특징이다. 일본에서도 대가야계의 피어스 이어링이 다수 발견되어 있다.

치산동고분군에서 출토 한 금동 관은, 관대의 전면에 가에 모양의 장식이 좌우에 각 l 개인씩 붙여지고 있는 반월형의 입 식 장식을 하고 있다. 후쿠이켄의 니혼마쓰 산 고분에서 출토 한 금동 관이 이것과 같은 계통을 가진것이라고 추정되고, 당시의 크고 가야 와 일본의 관계를 알기 좋은 자료로 된다.

 

대가야의 마구

일본열도에 전파되고, 고분 시대 후기의 마구의 주류를 형성 했다. 대가야 의 전성기에 말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풍습이 유행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비고)

한국의 전시물은 촬영 하고 왔기에 여기서 양쪽을 사진으로 소개 하면 비교할 수 있어서 좋지만, 일본의 박물관은 허가 잡지 않으면 촬영 못 하고, 거기까지 안 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박물관의 팜플렛에는 아무것도 씌여 있지 않은가 플래시 촬영 금지라고 씌여져 있지만, 어느 일본어판 팜플렛에도 사진 촬영 금지라고 쓰여지고 있다.

 

순장

순장란, 죽은 주인을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강제적으로 죽여서 함께 매장 하는 장례식 행위를 말한다. 순장는 죽은 뒤에도 생활이 계속된다는 츠기요 사상에 따라서 진행되었다. 신라에게도 있지만, 가 야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나가노·군마켕에 말을 순장 한 고분이 몇개 있지만, 사람의 순 장례는 없을것 같아서, 일본에서는 토용이 그 대신에 되었다고 생각한다.

 

(5)한국 서남부 영산강 유역

더욱 반도의 서남부에는 일본의 전방후 원 분도 산재하고, 일본인(왜인)의 발자국을 느낍니다. 한국의 학자 속에는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한국에서 전해졌다」라는 주장도 많다고 하지만, 오사카 대학에 유학하셔서 일본의 고분을 상세하게 연구된 경북대학의 박천수 교수는, 무력 응원의 요청으로 왜인이 온, 당시는 반도와 열도와로 사람이 오고 가고 있었던, 그 인식이 중요, 라고 쓰여지고 있다. 고분의 설명판은 전부「한일문화 연구의 중요한 유적이다」라고 말하는 표현이 되고 있었다.

                  (함평 죽암리  장고 고분)

 ()연구는 없는 편이 글이 의미가 통하는   (함평 례덕리 신덕고분) 

(참고 1 )

다시금 이 전방들후원분은 한국에서의「도래 문화」이며, 시나노의 도래 문화를 테마로 하는 본고에서는 저는 상세를 생략 한다.

(참고 )

저는 대구에서 박천수 교수를 방문해 갔지만, 공교롭게 일본에 출장중에, 만날 수 없었다.

(참고 )

일본은 고분의 곁에 박물관이 있는 것은 적게, 일반적으로 그 행정구의 박물관에 다른 전시물과 함께 출토품, 사진과 설명이 전시됩니다만, 한국에서는 큰 고분은 전용의 박물관이 인접 되고, 미니어처 세트로 고분 조영의 모양을 재현 해 있고, 대단히 이해 하고 쉬웠다. 출토품의 정교한 금세공·옥세공 기술과 끈기의 전통이, 현재의 미니어처 세트에도 연결되고 있는것 처럼 보였다.

창녕 박물관

(참고 )

저는 목포 대학교의 금건 수 교수를 방문하고, 이 이야기를 하면「한국은 고고학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는 나고야 대학에 7년 유학 했다. 최근 간신히 문화재 보호에 힘을 기울이게 되고, 박물관도 세우게 되었지만, 최신의 방법을 받아 들이고 있다. 일본은 옛날부터 있기에, 반대로 전시 방법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어 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고들 말했습니다. 기타 김 교수부터 다양한 것을 가르쳐 주고, 점심도 받았다.

(참고 )

저는 목포대를 사 해서, 일본에 한자를 전한 왕인 박사의 탄생지에 갔다. 큰 공원으로 해서, 관광 명소로써 판매하고 중이였다. 왕인 박사의 묘가 히라카따시에 있지만, 저는 찾는데 30분이나 걸려서 고생했어요라고 대조적이였다.

(참고 )

일본에서는 신라의 고분이 유명이며, 경주는 석굴암이나 불국사와 함께 인기의 어떤 마을에서 저도 20년전에 2번 찾아오고, 천마총등 보았다. 그렇지만 시나노의 고분에로의 영향은 적게, 저는 본고에서는 생략 한다.

 

3절 중국 (고구려 )

2008 6월 저는 중국 동북부 - 북한과의 국경 부근 있고 있는 집안시에게 갈때, 고구려 시대의 적석총 고분이나 광개토왕비를 보고 왔다.        

집안시 장군 둔덕

 

3장 상관관계의 연구

1절 연구사의 설

고분 연구로 저명한 모리 고이치 교수에 의하면, 도래 문화와 관계되는 고분, 특히 적석총의 연구에는 이하의 어려움이 있다.

·대륙제 지역과 일본열도제 지역이라고 직접 관계 한 것을 적는 사료가 극단적으로 적다.

· 89세기에는, 고분을 만드는 풍습이 없어지고 있기 위해서, 고고학적으로는 도래인 거주의 흔적을 따르기힘들다.

 

따라서 연구사도 학설로써 명확한 논문은 없이, 보고서도 고분을 분석 한 데터는 있지만, 도래 문화로써 명확하게 관련성을 쓴것은 없다. 단지

강연회등으로 의견을 말하거나, 서적으로써 쓴것은 있고, 여기서 소개 한다.

 

「시나노」의 왕묘의 고고학 카와사키·편

이 중에서 모리 고이치 교수의 헤이세이 7(1995) 이이야마시에서의 강연회 『고대 일본해 문화와 시나노』의 강연 내용을 발췌 하면

@ 고구려 초대의 왕가의 자손이 이루어지고 왔다. 타카이군에 자리잡고 살아서 말의 사육을 하고, 많은 적석총를 만들었다  

A 『삼국지』에 의하면, 침나무 루부는 고구려에서 격의 높은, 왕을 내는 문벌이다. 후에 스스기와 이름을 바꾼 「괴루진로」이 중요해서, 스스기신사는, 1개는 고쇼쿠시 야시로로 말을 한마리 파묻혀 있었던 다섯륜 당 유적의 가까이, 또 하나는 마츠모또시 사또야마베의 스스기카와의 근처 하리즈카 (적석총)의 가까이에 있다.

B 『신선 성씨 녹』으로 고구려의 시조의 자손라고 명칭 하는 사람들이 「타카이」와 자칭하고 있다.

C 『일본후 기』연력1811월에 시나노의 도래계의 사람들의 개성 기사가 있다.

D 시나노에서 가장 낡은 적석총라고 생각되는 수사카의 욜로이츠카는 크게, 게다가 2개의 고분이 한 가운데에서 달라 붙고 있다. 바로 근처에 강이 흐르고, 입지 조건은 구름 평리와 비슷하다. 출토 한 금동 제품은 백제의 공주에 있는 송산리고분 출토의것과 잘 닮고는 있지만, 고구려 (북한)의 안악 3호 분의 무덤 실내에 그려지고 있는 사자의 얼굴과 똑같다.

E 기지마다이라무라의 네츠카 고분에서 고사리수상에 구부러졌던 철 검이 출토 했다. 구부러졌던 철 검은 울산 하데유적에서도 출토 하고 있다.

 

모리 교수의 강연 내용은 자기의 연구의 좋은 지침이 되고, 저는 또한 따라서 실지 조사 하고, 또 이하, 문헌으로 확인을 했다.

A『삼국지 위서 3십』『신당서 권 236

三国志 魏书三十  乌丸鲜卑东夷传第三十

    高句丽在辽东之东千里,南与朝鲜、濊貊,东与沃沮,北与夫馀接。(略)东夷旧语以为夫馀别种,言语诸事,多与夫馀同,其性气衣服有异。本有五族,有涓奴部、绝奴部、顺奴部、灌奴部、桂娄部。本涓奴部为王,稍微弱,今桂娄部代之

(참고)더더욱 이다음에 유명한 야마타이국의 기술이 있다.   韩在带방之南,东西以海为限,南与接,방可四千里。(略)倭人在带방东南大海之中,依山岛为国邑。旧百馀国,汉时有朝见者,今使译所通三十国。

저는 『후한서 권 85』『구당서 권 2백십1』『양서 권 제 54』『위서 권 88』도 합치고 읽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전기 하고 있는것 처럼 보인다.

   凡有五族,有消奴部、绝奴部、顺奴部、灌奴部、桂娄部。本消奴部为王,稍微弱,后桂娄部代之

(참고) 이 고구려본 기첫 첫 분에

朱蒙乃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水【一名盖斯水 在今鴨東北】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고 있고, 저는 이것은 이즈모 신화의 이나바의 흰색토끼가 바다에 나란히 선 상어의 위를 건너는 이야기의 근원의 생각이 든다.

 

B『신선 성씨 녹』의 제 3 /제번·미정 잡 성에는

・本貫:右京 種別:諸蕃 細分:高麗 氏族名:長背連 始祖:出自高麗国主鄒牟[一名朱蒙]也 記事:天国排開広庭天皇[謚欽明。]御世。率衆投化。□美体大。其背巾長。仍賜名長背王

・本貫:山城国           種別:諸蕃 細分:高麗 氏族名:高井造 始祖:出自高麗国主鄒牟王廿世孫汝安祁王也

고 있고, 조선 반도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3국 사기』의 권 제 십3고구려본 기 제일은 이하가 있기에, 타카이 성은 고구려의 왕을 출신으로 하는 씨족이다.   

・始祖 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단지 야마시로국에서 시나노까지의 타카이 성의 경로는 아직 분명하지 않는다.

 

C『일본후 기』의 延 력십8년 십1월이 아니라, 2월에 이하의 기술이 있다.

  저는 알기 쉽도록 순서를 교체해서 고쳐 써 보면 다음으로 된다.

日本後紀卷第八起延暦十八年(中略)十二月癸酉

信濃国人外從六位下 卦婁眞老〜上部色布知等言。己等先高麗人也。小治田。飛鳥二朝庭時節。歸化來朝。自爾以還。累世平民。未改本号。伏望依去天平勝寳九歳四月四日勅。改大姓者 從六位下 卦婁眞老。→須須岐

後部黒足。→豊岡  前部黒麻呂。→村上  前部佐根人。下部奈弖麻呂。  

前部秋足。→篠井  小縣郡人无位 上部豊人。→玉川  下部文代。→清岡  

高麗家繼。→御井  高麗繼楯。  前部貞麻呂。→朝治 上部色布知→玉井

E 저는 욜로이츠카는 보고 왔다. 훌륭하지만, 이것이 왕의 고분에 어울리는 것인지는 잘 몰랐다.

저는 백제의 공주에 있는 송산리고분은 8월 말 방문 예정이지만, 고구려 (북한)의 안악 3호 분는 가고 싶어도 현재의 국제 정세부터 어렵다.

F 저는  네츠카 고분에 갈때, 매장품의 검의 레플리카를 보고 왔다. 감음초의 장식에 특징이 있고, 발굴된 오오츠카 교수는 가야의 검이라고 생각하고, 규슈 대학의 니시타니 교수는 가야의 검인 것을 확인되었다. 야요이 도키요 후기나머지 예를 보지 않는 분 언덕묘에서의 출토이며, 반도에서 일본해를 직접 건너 오게 되는, 그렇다.

저는 한국 울산의 하대유적에 갔지만, 출토품은 어디에 있는지 몰라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가야 지방의 고분, 박물관에는, 환두 긴 칼은 반드시 있고, 네츠카 고분과 한국 남부와의 관계는 깊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발굴부터 본 동일본」 제 3차 미야가와 기념 강좌에서, 나가노의 수 많은 고분 발굴을 하신 오오츠카 교수도 오오무로 고분군에 대하여 하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 오오무로 속에서 약 30기가 석실의 천장의 돌이 지붕형의 합장형. 이 합장형 석실은 나가노 분지  이외로는 야마나시켄에 한가지 실례 있을 뿐이다.  

A 오오무로 고분군은 훔쳐 남긴 토기등에서, 합장형의 축조 연대는 고분 시대 중기의 5세기이다.

B 새로운 매장 방법, 요업 기술이 조선 반도에서 들어 오는, 지역에 따라서 흙을 담은 고분에서 쌓고 돌의 고분으로 변한다. 오오무로 고분군의 스타트인 합장형 석실에 매장해진 사람들은 도래계의 사람들이다.

C 엔기식에 오오무로 목장의 감독관은 조선 반도의 출신자이며, 대단한 공적이 있었다는 것으로, 야마토 정권에서 지위를 받고 있다. 저는 오오무로 고분군의 적석총의 출현은 말의 사육에 관계되는 집단의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대째, 삼대째가 되면, 재지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온다. 그리고, 마을 ×의 사람들도 모두 적석총를 만들어 가게 되고 와서, 전체로 500 기초로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2절 고분의 형태, 출토품에 의한 상관

(1)중국·한국과의 적석총 비교

오오무로 고분의 제일의 근원이라고 말한 중국 집안시로서는, 저는 환도산성의 풍경 ·지형, 배후의 산의 모양, 앞에 있는 강, 평야가 오오무로와 똑같기에 놀랐다. 그러나 세계 유산의 장군 둔덕은 특별로써도, 강변에 나란히 서는 왕족·귀족의 고분도 모두 크게 모양도 훌륭해서, 저는 오오무로나 요코네의 단지 강변의 돌을 쌓아 올린것 만큼 같은 적석총와는 참으로 다른 느낌이 들었다.

집안시 왕족·귀족의 고분군

저는 오오무로는 고구려의 도래인을 처음으로 만들고, 후는 닮은것 같은 한명분의 물건을 잇달아 만든것 처럼 생각된다. 저는 전절의 오오츠카 교수에게 비슷할 생각을 가졌다.

또한 서울의 석촌동 동 고분과 비교하면 저는 이와 같은 규모의 적석총는 일본에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3단의 기 단을 가지는 것은 수사카의 요네모치 천신 1호 분 이다.

テキスト ボックス: 30 mx35m의 사각형, 주위에 
50 m각의 홈이 있다. 
집의 모양이나 의자의 토용의 파편이 출토

       요네모치 천신 1호 분

일본의 적석총는 자연석을 엔 분상에 쌓았을 뿐인것이 많아, 내가 본 속에서는 마츠모토의 하리즈카가 기 단을 가지고, 석촌동 동이나 집안의 고분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마츠모토의 하리즈카

 

(2) 오오무로 고장의 사람의 조사

오오무로 고분은 출토품이 부족하게, 조사 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고장의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생각하고, 저는 타카이 오오무로 신사의 기부 명부를 촬영 하고, 도서관의 전화번호부로 조사해서, 고장의 향토사를 연구 하고 있는 사람과 마츠시로 의 향토사 강좌의 강사로, 이전에 오오무로 고분 발굴 할 때에 입회하고 있는 기타무라보씨를 소개되었다. 저는 기타무라 선생님에게 도래인의 흔적이 없는 얼굴 묻었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라고 말하는 대답이였다.

또한 향토사를 연구 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서는 쇼와 2(1927)에 돌아가셨던 교장 선생님이 고분의 모임을 묶고 있었다. 아들의 대에 공민관을 신축 해서 출토품을 모았지만, 후에 구에 파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안 남고 있었다. 마을사, 자명 대장도 전부 없어지고 있었다.

여기는 우에스기 켄 신의 영토였지만, 다케다 신겐이 공격하고 왔을 때에, 주민 (사무라이)는 우에스기가문과 함께 아이즈에 도망쳤다. 에이후쿠사 주지의 이야기로서는, 동북에서 사이토, 스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선조는 오오무로부터 왔다」와 방문하고 왔다.

 

또한 마츠시로  출신으로 히하터라고 말하는 체신성에서 교통사책이나 삽화를 그린 사람의 고고학 잡지의 복사를 받고, 이하 발췌 하면

16권 제 11 (1926)오오무로 고분 에 관한 한 고찰

· 오오무로 마키목장가 있었다. 마키우치, 마키시마라고 말하는 지명이 남고 있다.

· 차차로 개간되고, 뽕밭이 되어서 파괴되었다

· 아이누식 토기의 파편도 다소 있는 동시에 순조선 전래라고 인정 받는 쥐색으로 무양의 어떤 도자기가 혼입 되고 있다.

· 곧 칼 마구의 파편등이나 다소는 있지만 진귀한의는 없는것 같다. 결국 고귀한 분묘가 없다.

· 옥류에는 이즈모석이 많이 있지만, 조선 장래라고 인정 받는 비 미도리의 곡옥이 왕왕 발견되어 있다.

· 메이지 연간에 아메미야 마을의 츠카보리의 명인 로크좌에몽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눈에 띈 물건, 곡옥, 관 구슬의 동류를 번성하게 발굴 해서 팔았다, 라고 말하는 것을 잘 듣었다.

 

오오무로 고분에는 현재 출토품이나 단서가 남지 마세요, 도래인의 흔적을 찾기곤난하다. 물론 이것은 당초로 부터 알 수 있고 있었던 일이지만, 결국 저는 그 이상의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3)주변과의 비교

관련되는것 뿐만아니라, 서로 부딪치는 물건도 보기 위해서, 나가노켄 주위의 고분도 참조 하려고, 저는 시즈오카켄의 하마마츠시, 이와따시의 고분과 그 출토품을 전시해 놓는 하마키따 뮤지엄, 하마마츠시 박물관을 견학 했다. 이 지방의 고분의 인상은 나가노에게 비교해서 크게 훌륭한 일이다. 나가노는 모리 장군 둔덕등 몇개인지를 제외하면 소형인 원 분이 많은데 대하여, 하마마츠는 대형 전방후 엔 또는 전방후 쪽 분의 (평탄지에 만들어졌다)주구도 가지는 규모의 큰것이 많다.

더더욱 저는 니혼가야 적석총 고분을 보았다. 28기가 확인되고, 현재는 6기가 보존, 공원이 되어서 공개되어 있다. 강변석를 쌓아 올린 한 변이 39 m 쪽 분이지만, 돋구지 않고 있게, 평평하다. 5세기 후반의 구동식로, 상부의 분 언덕이 없어지고 있고, 추정에서는 0. 51 m위의 높이와의 일. 그러나 복원된 그 모양은 가야의 고분의 축조 도중에 비슷하다. 2장 제 2절의 미니어처 전시에 잘 닮은의가 있었다. 또한 나가노나 야마나시의 적석총와는 모양이 다르다. 円분나 전방후 원 분이 전국에서 크기는 달라도 닮은것 같은 모양이는데 대하여, 적석총는 그 지방에 따라서 모양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산천 출판의 시즈오카현의 역사에 의하면, 시즈오카현은 지금은 도카이도 신간선, 동명고속 도로가 있어서 동서의 교통이 중심이지만, 고대는 야마나시, 나가노와의 교류가 번성했다,와 있고, 적석총는 노토호쿠리쿠나가노, 야마나시시즈오카라고 전해지고 온것 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반도에서 와서 상륙 하는 노토, 호쿠리쿠에 적석총가 적는 것은겠다. 저는 적석총 문화와 마필은 관계가 깊이, 말 기르고에게 적 한 토지인 나가노, 군마, 야마나시에게 이동 한것이라고 생각한다.

 

(4)적석총의 비교

나가노시, 수자카시

오오무로

10 m 56 m의 전방후 원이 하나

엔 분 합장형 25기 가로 낸 굴식 석실

500 58세기 합장형은 전국에서도 4050기 마구, 말형 토기

뽕 네이공 둔덕

경품부17 m,

 

엔 분 합장형 가로 낸 굴식 석실

7세기 후반 곡옥, 管 구슬, 스에기 배 한국 공주에 상사 구조의 고분이 있다

8개 가이츠카

 

25m

게시문 첨부 엔 분

조개 釧, 쇠테구 (조선 반도 출토품에 비슷하다)

고후시

요코네·사쿠라이

5〜8m

적돌무덤

원 분

57세기 200기금 환, 하지기, 스에기, 유리옥

하마마츠시

두개 케산골짜기

3〜9m

적돌무덤법 분 수혈식

동 거울, 철 검, 철도, 곡옥, 스에기, 하지기 부장품이 없는 둔덕도 있다.

다카사키시

겐자키 나가토로서

 

적돌무덤

철의 투구와 갑옷, 옆에 말의 매장

 

 

이 중에서 전국적으로는 적석총의 기수는 2 %을 차지하는데 대하여, 나가노켄에서는

30 %, 야마나시켄에는 20 %의 적석총가 있고, 노토, 호쿠리쿠에는 그다지 없다. 게다가 적석총는 1개소에 집중 하는 경향에 있기에, 있는 부족, 촌락만이 가지는 문화인것 처럼 생각된다. 반대로 말하면 1개소에 집중 하고 있기에, 기수만의 비교에서는, 진정한 규모의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하여, 시즈오카의 큰 고분은 세토나이카이긴키도카이의 흐름을 받는 중앙이라고 관계 하는 지방 호족과 같이도 생각된다. 오오무로 고분이나 요코네·사쿠라이 고분과 같이 강변석를 쌓을 뿐인 적석총는 누구나 다할 수 있도록 보인다. 훌륭한 굴식식 석실은, 설계 하고, 돌을 가공·운반 하거나, 단정히 쌓아 올리는 기술이 필요한다.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통솔 취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팀 만들기가 필요해서, 시간(시대)의 차이도 있지만, 정치력, 경제력의 어떤 사람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저는 이하의 차이점을 올린다.

@ 일본의 적석총의 근원의 고구려의 왕의 무덤은, 방형 /원형, 단쌓기, 등형이 정리되고 있고, 다양한 사람인 가즈에·기술이나 조직이 없으면 구축 할 수 없다. 그 가계의 분파가 일본에 도래 되었으면, 크기는 어쨌든, 모양은 흉내낼 것이지만, 오오무로나 요코네는 단지 쌓아 올린 모양이 많아, 단쌓기 방형은 없다.

A 많은 고분에서는 타개 하거나, 사각에 모양을 끊은 (깎었다)돌을 쓰고, 석실도 방으로써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오오무로인 경우, 석실이 있어도 이름 대로, 방이 아니라 실 (돌을 쌓은 공동)이 많다.

B 야마토 조정과의 관계가 있는, 고들 말하는 지쿠마시 (나가노시의 남쪽)모리 장군 둔덕이나 시즈오카켄의 전방후 원 분은 분묘의 크기도 물론이거니와 또, 주위를 포함한 스케일의 크기, 분위기에 장엄함이 있다. 현대까지 손질도 되고 있고 (그것을 누가 하고 있는가 조사하지 않고 있지만)대대 가치를 인정 받고 있는, 라고 말 할 수있다.

 

(5)나가노현의 남북에서의 차이

나가노켄의 남쪽, 텐류천의 하안단구에 있는 이이다시도 고분이 집중 되고 있는 장소이며, 도래인을 기르는 법을 가르쳤다고 여겨지는 말의 매장이 많이 볼 수 있다.

저는 이이다시 미술 박물관을 방문해서, 오카다 관장부터 「남나가노의 도래 문화 - 고분 시대를 중심으로 해서」라고 말하는 연구 기요 (2006 16)를 받고, 견학 해야 할 고분을 가르쳐 주셨다. 연구 기요의 내용의 포인트는

 

여기는 조선 반도 남부의 가야의 영향을 받고 있는 출토품이 많아, 상기 기요에 의하면, 동아시아의 고대 문화를 생각하는 모임 주최의 국제 심포우지움은, 가야 문화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하고, 「고대 가야의 철을 둘러싸는 일한 고고학계의 인식에 큰 현 격이 있다」와 검토를 요구하고 있는 (오쿠노타 2002 ). 니시야마 씨는 「시나노의 고분 시대 중기」로 「북쪽의 젠코지 평으로서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값에 걸어서 고구려적인 문화의 영향을 보이고, 남쪽의 시모이나 지역에서는 굴식식 석실의 구조나 순 장 말의 본 자세등에서, 5세기 중간 이후의 5세기 후반에는 가야 지역적인 문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라고 말한 (니시야마 2003 )

 

(참고)

  이이다시교육 네트워크 공식 사이트에 「말의 생산부터 세력 확대 (고분 시대) 

고 말하는 자료가 있고, 천무  천황이 넓히려고 한 「후혼돈」을 소개 하고 있다. 그 중에서

   「후혼돈」이 이이다시 자코지부터 출토 했습니다. 전국에서도 40점 약한가 발견되지 않고, 동일본에서는 지바켄 아비코시에서 1점 출토 하고 있는 이외는, 곤가유적 주변에 2점 나서고 있다.  수도 만들기에 깊이 관련된 「후혼돈」이 출토 한 것으로, 이 지역이, 천무 천황의 「 제 3의 수도」의 후보지이였던라고도 생각됩니다.

고 있고, 저는 향토애가 심해져서 그런지 되고 붓이 달리고 있다, 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의 고대 9율령 제와 도성」의 중에서, 천무 천황이 수도의 후보지 물색을 하고 있는, 시나노까지 나갔다, 라고 말하는 기술이 있고, 일본서기 속에 이하의 글이 있었다.

29天武天皇十一年(682)三月甲午朔◆三月甲午朔。命小紫三野王。及宮内官大夫等。遣于新城令見其地形。仍將都矣。

29天武天皇十二年(683)七月癸卯《十八》◆癸卯。天皇巡行京師。

29天武天皇十三年(684)二月庚辰《廿八》◆庚辰。遣淨廣肆廣瀬王。小錦中大伴連安麻呂及判官。録事。陰陽師。工匠等於畿内。令視占應都之地。▼是日。遣三野王。小錦下悉女臣筑羅等於信濃令看地形。將都是地歟

천도이 아니라, 동국에 대하는 출장소의 지방 사무소의 후보지 물색이라고 생각되지만, 저는 중요한 토지였다는 것을 인식 했다.

 

3절 풍토에 의한 상관

중국 집안시 환도산성의 풍경, 지형은 마츠시로  오오무로와 잘 닮고 있고, 왕궁 철거지에 서면 참으로 오오무로로 같은 장소에 서는것과 같은 감각이다. 귀국후, 저는 다시 오오무로에 갔지만, 역시 환도산성 와 같아서, 양자인 상관를 강하게 느꼈다.

또한 고구려가 있었던 구만주·북한과의 국경 부근은 나가노 분지와 잘 닮은 풍경으로, 기술 「시나노의 왕묘의 고고학」으로 모리 고이치 교수도 지적 하고 있다.

집안시 환도산성

         나가노시 오오무로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한국, 노토, 호쿠리쿠와 자기가 보고 다닌 데 한에서는, 도중에닮은 것 같은 지형이나 적석총가 없이, 이 시대에 일약에 집안에서 오오무로 에게 왔다고는 생각에 말뚝. 금후 더욱 좀 더 상관을 나타내는 증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

또한 다른 고분에서도, 고분의 배경 (배면)이나 고분에서 보이는 산의 모양이 집약세나 오오무로에게 비슷한 경우가 많아, 바람수에 의한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고분의 입지 조건에 깊이 관계 한다고 생각한다. (별지도 5 )

 

4절 그 밖의 상관

(1)노토·호쿠리쿠에는 도래계의 신사

저는 기술의 어떤 사람, 약사 치료에 우수한 사람인 경우, 고분 뿐만 아니라, 위인으로서 받들어지는 신사가 만들어지는것 처럼 생각한다. 노토·호쿠리쿠에는 도래계의 신사가 많다. 저는 고분 뿐만 아니라, 신사와의 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견학에 갔다.

방문지는 별지 리스트에 의하지만, 이 중에서 구 삼 가오도 아라 가시비 후루카미사에 관해서 도래계와의 관련이 강하게, 저는 WEB 정보를 하기에 인용 한다.

 

노토반도는 고대 대륙이나 조선 반도의 선진 문화를 직접 흡수 하고, 대륙이나 반도와 동질인 문화 권을 형성 하고 있었던 지역이며, 도래계의 사람들이 많이 자리잡고 살고 있었다. 중에서도 신라·가나계의 문화가 번성, 신라계의 진씨가 많았던것 같다.

노토반도의 신사의 8할이 도래계의 신이라고 해지고 있다. 신라 신사에 관계가 깊는 것은 다츠루하마마치의 시라히코신사에서, 오래 전에는 신라 신사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나카지마마치의 크마카부트신사도, 신라의 왕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츠누가아라시트신을 제신으로 하고 있는 신라 (加羅)계의 신사이다. 

노토를 포함한 에치젠·엣츄의 지방은 고대, 엣의 나라라고 불리우고, 북서의 계절풍에 타고 조선 반도에서 많은 도래인가 있었다. 다시금 야요이 도키요에게는 논벼 경작과 옥만들기의 겸업이 진행되고 있었던것 같다.  만엽집에 고대에 신라제의 손도끼가 귀중품으로써 쓰이고 있었던 것이나, 쿠마키가 고려 래 이다고 하면, 고려와 신라가 동거 했던 적이 되는 노래가 있고, 조선 반도와의 깊은 련계를 볼 수 있다. 

사기 및 유서기에 의하면, 제신은 「한국의 왕족」으로, 「아라 가시비 낡은 아라카시히코신」은 지신, 또는 아첨하고 나국 (변진의 지방)의 왕족이라고도 말하여 지고 있고, 현재의 진좌 지방을 평정되고, 그 수호신으로서 모시어져 있다고 말한다. 옆에는 도래인의 정주지로써, 고구려에서 온 것을 의미 하는 지명도 있고, 고대 남조선의 문화를 색깔이 진하게 남긴 축제로써, 나라의 중요무형 민속 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다.

 

(2)

노토의 히오키신사·가시와라히코신사의 기부자의 성을 본다고 진귀한 성이 많을 것이라고 하나의 한자가 많기로 알아차렸다. 한국, 중국에는 하나의 한자의 성이 많아, 자기가 이것은, 이라고 생각하는 이하의 성에 대하여 성명 사전으로 조사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특히 도래 에 관한 기술은 없었다. (성의 근원은 카마쿠라 도키요 이 降 에 관한 기술이 많아, 그 이전에 대하여는 더듬기힘든것이라고 생각한다)

 

(3)노토의 고분

2절에 관련되어서, 노토에게도 고분은 많이 있지만, 저는 가까운 시일에 수소 에조 구멍 고분이 반도계의 영향이 강하다고 여겨지기에 사진으로 소개 한다.

  

수소 에조구멍 고분  2개 줄지어 있다   돌을 평평해서 쌓아 올리고 있다

 

(4)반도에서 본 위치적 상관

현대 일본에서는 도카이도, 세토나이카이를 중심으로 하는 태평양측이 정치, 경제의 중심이지만, 고대는 반도·대륙에서의 선진 기술 문화가 도래 함에 따라, 일본해측

그러나 일본의 정식 현관이며, 반도에서 일본으로 향해 보았을 때, 어떻게 보이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반도에서 해상을 남쪽 또는 동쪽에 나설 때, 일본열도는 시야각의 상당히 넓은 범위로 넓어지고, 똑바로 가면 일본에 도착한다. 노토반도는 그 중심으로 되어서 앞에 돌출하고 있고, 목표로 하는 목표가 되고 쉽다. 저는 어릴때 뒤 일본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참으로 일본의 겉, 정면 현관이였다.

노토반도의 첨단 롯코오자키에는 노토를 중심에 동심원이 그려져서, 노토가 일본의 중심이다, 라고 말하는 도화 있었지만, 저는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저는 근간에 배를 타고 일본해에서 바라보고 싶다. (저는 배에서 조카이산을 본 것은 있다)

 

정리

 결론

자기의 고향에 있을 것, 또 잔존 자료가 모자라게 학설이 확립 안 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도래인」에 로맨스를 느껴서 오오무로 고분의 적석총를 테마로 들어서 연구 해 보았지만, 역시 확실한 증거는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발견과 결론은 낼 수 없었든지 간에, 선생님의 지도 아래 저는 이 2년간으로 관계 하는 장소를 실지 견학에 나가거나, 문헌을 읽거나 한 것으로, 조선 반도와 일본 (주로 중부·호쿠리쿠 지방)의 주요 고분의 상관은 파악할 수 있었다.

오오무로 고분의 적석총 이외의 시나노의 고분에 관해서는, 3장의 내용을 모으고, 저는 이미지적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 고구려·신라부터 직접 호쿠리쿠에 와서, 시나노에 온것

A 가야 경유로 일본해측에서 시나노에 온것

B 야마토 조정의 영향을 받은것 (남신에서)

그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저는 있는 지식·결론을 가질 수 있었던 충실감은 있고, 공부의 성과는 컸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는 기술자로서 기업 근무을 겸하여 3십년 가까이 걸려서 조금씩 책을 읽거나, 중국어·한국어의 공부를 하고 온 것이, 실제의 연구에 살릴 수 있고, 열매를 맺었다는 충실감이 있다. 간신히 저는 고고학이 아는 단계에 입었기에, 지금까지 읽은 문헌의 저자나 전문가에게 지도 하면서,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출토품에로의 접촉이나 실제의 발굴 작업에로의 참획등이나 포함할 수 있고, 앞으로도 더욱 연구를 전진해서, 보다 확실한 성과를 내고 싶다.

 

금후의 과제

지도의 선생님부터 과제의 지적을 받았지만, 저는 그다지 해결 할 수 없었다.

저는 연구 도중에서도 여러가지 의문 점이 나왔지만, 하다가 못한 것이 많이 있다. 특히 기계 공학을 전공 한 사람으로서, 저는 큰 돌의 가공, 운반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고분을 만드는 공수나 기술, 더욱 무너져 가는 모양을 추정 해 보는 것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더욱 저는 컴퓨터 기술자로서 데터 분석등에 의한 상관의 해석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고분의 이해, 고고학의 습득이 필요해서, 그것으로 2년간이 지나 버리고, 거기까지 갈 수 없었다.

저는 앞으로도 연구를 계속하고, 고고학과 컴퓨터 과학의 연휴에 의한 해석을 하고 싶다.

 

부기

(1)문헌 리스트 (별지표 5 )

(2)시가·오사카·효고의 도래 문화 조사 보고

  용어의 설명으로 스에기의 목덜미, 및 노토의 신사의 목덜미로

신라 왕자와 관계가 깊다고 여겨지는 시가켄 류오쵸나 다지마 지방. .

신라의 왕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신을 제신으로 하고 있는 신라 (加羅)계의 신사.

고 말하는 기술을 읽고, 또 에치젠 출신으로 도래계라고 불리우고 있는 계체천황에 대하여 조사하려고 교토 세미나의 때에 주란을 모았다.

(3)규슈, 동북의 죠몽·야요이 유적 조사 보고

2005년에 아이치켄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회장의 시민 부스로, 자기의 친구가 주재 해서 휴경 논을 지주부터 빌리고, 휴일에 일반 시민이 모여서 벼 일으키는  프로젝트의 성과 발표를 했다. 자기는 거기서 벼농사의 전래에 대하여 발표 하는 역할을 담당 하고, 그 전시물의 취재로 규슈, 동북의 유적을 돌았다. 고분 시대 보다 앞의 유적이지만, 이번 문헌을 읽었을 때에 토지감각이나 주위 환경이 알고, 특히 이키·츠시마는 예로부터 조선 반도와 일본의 중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왔다.

이 경험이 방송 대학원에로의 진학의 동기로도 되었다.

더욱 이것과 관련되어서 2007년 저는 상해 외국어대학의 중국어 단기 유학 한 때에, 항주 절강성 박물관, 샤오싱, 하 모 도 유적, 닝포에 다녀 왔다.

어서 저의 HP http://www.gctv.ne.jp/mmura/ 도 참조 해 주십시오.

 

                          이상